오만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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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zahamuseum 댓글 0건 조회 2,818회 작성일 21-10-26 14:45작가명 | 이원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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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 2021-10-29 ~ 2021-11-30 |
전시장소명 | 자하미술관 |
전시장주소 | 03022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 자하미술관 |
관련링크 | https://www.zahamuseum.org/%EC%9D%B4%EC%9B%90%ED%98%B8-%EA%B0%9C%EC%9D… 1593회 연결 |
대화 또는 독백
; 실재와 허구가 만나는 시간
김노암
그이는 말야 여자를 감동시키는 것이 있어. 많지. 날 살렸잖아. 그냥 스친 인연인데, 가족처럼 책임을 진거야. 나를. 그이는, 어항처럼 눈물을 담고 있는 거야. - 작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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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 작가의 작업은 연출과 배우가 서로 충돌하고 상호개입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 점차 변화하며 최종적인 캐릭터가 완성되어가는 중간과정을 보여준다. 한 명의 독백 또는 구술에 의거해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만들어간다. 작품은 탑골공원 인근 국밥집에서 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7명의 필자와 공동작업을 통해 49개의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다양한 개성과 연기력을 지닌 연기자들이 연기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배우와 연출자, 이원호 작가 삼자가 스토리텔링에 상호개입하고 삼투하며 삼자가 잠정적 합의에 도달한 인물의 성격, 그 인물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해나간다.
작품은 고백 또는 독백의 형태로 진행되지만 실제 작업과정은 다수 협업의 결과물이다. 독백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대화와 협업으로 구성된다. 일종의 페이크 독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한 개인의 내면에서 울리는 다양한 목소리가 대화하는 복수의 자아일 것이다. 하나의 근대적 자아가 아니라 분열되는 자아를 드러내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고백의 형식을 빙자한 독백이다. 이 독백은 화자의 기억의 명료함과 모호함이 뒤엉키며 기억의 차이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도도한 무용담을 구성한다. 물론 청자를 앞에 상정하고 있지만 말이다. 청자는 온전히 수동적 수용자로만 남는다. 화자는 회고 형식을 빌어 자신이 경험한 다수의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기억의 장소들을 건너뛰고 교차편집하며 의견(doxa)을 제시한다. 청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다. 온전히 긍정하고 동의하는 관계 속에서 대화의 형식을 빌은 독백을 멈추지 않는다.
화자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각인된 뚜렷한 기억과 다른 사건과 경험들의 침입으로 오염되거나 흐릿해진 기억이 공조하며 만들어낸 드라마는 무수한 이야기의 갈래 속에서 매번 극적이고 영웅적인 방향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무용담은 결코 평면적으로 밋밋하게 구성되지 않는다. 무언가 심오한 의미와 예지가 가득 찬 입체적인 사건의 풍경을 펼쳐 보인다. 오만가지 이야기, 오만가지 생각, 오만가지 사건과 경험과 후일담들. 이야기는 끊임없이 다른 일화로 넘어가고 연결되는 네버엔딩 스토리가 된다.
이원호 작가는 이 전 과정을 기획하고 기록하고 협업하고 영상화 한다. 49개의 이야기는 단지 49개의 산술적 의미를 넘어서 인간의 각양각색의 모든 이야기를 모았다는 은유이다. 이 은유들은 단지 머릿속에서 상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생활의 땀과 피와 눈물, 희로애락이 화학작용하는 존재 경험의 서사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이완이 뒤섞인 인간의 드라마이다. 그것이 아무리 상투적이고 뻔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말이다.
경험은 반복되지 않지만 유사한 경험들을 통해 반복된다는 인상을 준다. 상투성을 특징으로 하는 신파와 통속은 이렇게 결코 동일하지 않는 경험과 기억과 그것들 사이의 미세한 차이들의 집합이 동일성을 닮는 아이러니한 형식을 보여준다. 익숙하지만 낯선, 결코 새롭지 않지만 분명한 차이와 새로움을 함축하고 있는 스토리텔링이다. 상투적이고 뻔한 이야기의 전개는 신화의 속성이지만 그 신화를 경험하는 우리의 해석은 창조적이며 상상력이 넘치는 성찰로 나아가게 한다. 이야기의 앞뒤가 모순되는 개인의 황당한 무용담 속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언가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주변에서 반복적으로 듣게 되는 수다와 무용담과 상투적 신파는 영웅과 반영웅을 오가며 종잡을 수 없는 극단적이며 충돌하는 두 인격이 한 인물 속에서 구현되는데, 그것은 바로 신화를 재현한다. 이러한 근대 이전의 신화성의 회귀와 반복은 근대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하였던 독립적인 개인, 여성성, 사회 정의 그리고 궁극에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 사이에 파열음을 내는 소리들의 오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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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와 허구(환타지)가 여러 사람의 대화 속에 충돌과 동의 과정을 겪으며 하나의 허구의 캐릭터가 생성된다. 그 생성과정의 기록이 우리에게 전하는 통찰 또는 영감의 계기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인류의 역사는 곧 이야기의 역사이다. 세상은 거대한 재난과 비극에서부터 소소한 사건들이 뒤섞이며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무수한 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확인할 수 없는 진실과 거짓이 함께 숨어있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다른 사실이 동시에 떠오른다. 거짓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왕복한다. 의식이나 무의식 하나에 고정되지 않는다. 고정점은 매순간 변화하기 때문에 사건으로 나타난다. 모든 화자의 전제는 이야기 전반의 주인공이자 동시에 전지적 작가의 위치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벗어남의 결과와 상관없이 비록 실패하더라도 견디고 벗어나려고 하는 정신은 무모하지만 용맹하다. 오만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거나 충돌하며 불협화음을 만든다.
실재와 허구는 상호영향을 주고 상응하며 동등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캐릭터가 작품 속에서 미디어를 통해 공중에 제공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허구의 캐릭터가 실제 현실의 판단과 행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허구가 실재에 영향을 주고 현실을 변경한다. 이에 동의하면 허구와 실재의 존재론적 위상은 동일하거나 대등하다.
세기말 인구에 회자하던 그 무수한 만담과 추임새들, 더 먼 과거 수많은 객소리들, 고대 궁전 밖 담벼락에서 회자하던 이야기들, 청동기시대,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노동 가운데 잠시 떠들던 이야기들, 수다들, 수많은 드라마들이 우리가 숨 쉬는 오늘 이 순간에도 미세한 파동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구의 역사만큼 오래전에 사라졌던 수많은 이야기의 운동에너지가 정말 모조리 무화되었을까? 오래전 모 과학고 학생들이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임진왜란 당시 살았던 이순신 장군이 숨 쉰 그 공기를 현재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확률에 대해 계산을 했다는 전설 같은 무용담이 있다. 치기어린 과학고 청소년들의 무용담을 생각해보면 결코 인류역사를 통해 인간의 입을 통해 발화된 모든 소리는 결코 무화되지 않고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방문하듯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우리와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원호 작가의 작업은 멀리 나아가면 이 접촉의 기적, 이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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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만 있는 풍토병인 화병과 상사병이 있는데, 어떤 질병들은 그 기원이 문화적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한다. 본래 병이 아니었던 것이 문화적으로 반복되다보면 질병이 되어버린다. 질병만 그럴까? 탑골공원을 배회하는 노인들의 무용담에는 20세기 엄혹한 일제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후 6.25 남북전쟁과 월남파병, 오일달러를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를 마시던 우리의 조부모, 부모세대의 삶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게다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로 대변되는 독재체제의 반민주적 시기와 여러 차례 시민혁명을 통해 자리 잡은 민주주의 사회의 경험이 뒤섞인 거대 서사시이기도 하다. 개인의 무용담은 개인의 존재 경험에 국한되지 않고 그가 속한 시대의 전체와 유기적 관계 속에 의미를 획득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시험하듯 거대 서사시처럼 펼쳐지는 평범한 노인의 무용담은 신파를 넘어 ‘반지의 제왕’ 속 100세가 넘은 베긴스 삼촌의 거대한 모험담과 닮아 있다. 20세기를 살아낸 사람들에게 전쟁과 가난과 질병은 인간을 위협하는 잔혹한 오크나 거대한 오우거들, 야비한 고블린들이다.
역사는 하나의 철학, 하나의 관점에 따라서 과거의 사실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저잣거리의 무용담은 과거의 사실을 하나의 신화적 신념에 따라서 비체계적 또는 탈체계적으로 서술한다. 무용담은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모험담을 증거나 증언 없이 또는 가짜 사실, 조작적 사실을 반복적으로 첨가함으로써 독특한 감동과 향유를 불러일으킨다. 무용담 속 주인공은 모든 세계의 사건들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흥미롭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신파적 무용담들은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가 구별되지 않고 영화 속 포레스트 검프의 삶과 오버랩된다. 남다른 체험의 이야기들이 마치 방금 전 벌어졌던 현장감을 준다. 신파란 상투적이며 뻔뻔한. 너무나 반복적이다. 신파의 전형은 신화와 전설이다. 신파란 저열하며 동시에 가장 고귀한 삶의 비밀을 담은 신화이다. 일상 삶의 비천함을 거꾸로 영웅적 숭고한 고귀한 것으로 존중하는 연극(서사)을 펼친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자기다. 자기란 관계인데, 그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실존의 상황이다. 인간은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함으로써 거기서 타자와 관계하는 관계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마틴 하이데거에게 인간이란 관계 맺어진 존재이다. 관계란 대화이다. 그것이 언어이든 몸짓이든 무슨 형식이 되었건 관계맺기란 상대와 눈을 맞추고 입을 보고 표정을 보며 대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서로가 경험한 존재의 사태를 공유하는 통로로서 대화의 관계가 곧 인류의 문명을 만들고 인간 자신을 조성했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영웅적 행위를 통해 우리는 관계를 맺고 자기정체성을 획득한다. 결국 삶이란 나와 다름을 내 안에 수용하는 과정이다. 작가가 수집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해나가는 클리셰, 상투성의 미학은 인간 정신의 위대성을 삶의 낮은 곳, 가장 일상적이고 흔한 곳에서 기원한다.
무용담이란 앞뒤가 엉망진창이며 모순되고 상식과 몰상식이 뒤엉킨 비빔밥이다. 그러나 무용담의 중간 중간 갑자기 멈칫하거나 머뭇거림을 통해 어떤 진실을 노출한다. 탑골공원 주변을 배회하는 수많은 무용담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과정이 이원호 작가의 작업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타자와 만나는 통로가 곧 예술의 중요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다름과 차이를 있는 그대로 접촉하고 수용하고 승화시키는 과정이 작가의 작업 과정의 전부이다.
어떤 이는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충고한다. ‘죽음을 각오한 듯 글을 써라. 이와 동시에, 오로지 말기 환자로 구성된 청중을 위해 쓰고 있다고 가정하라.’ 이런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럼 글쓰기만 그럴까? 독백을 함께 만드는 과정은 이러한 복수의 결기들이 충돌하고 대화하는 현장이다. 다수의 의지와 세계관이 충돌한다. 복수의 세계가 거대한 충돌과 빅뱅을 일으킨다. 창의적 아이디어와 그것에 형식을 부여하는 작업은 당연히 이러한 결기의 태도를 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