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OCI YOUNG CREATIVES 경제엽 개인전 《먹고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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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CImuseum 댓글 0건 조회 240회 작성일 25-06-05 17:01
작가명 경제엽
전시기간 2025-06-12 ~ 2025-07-26
휴관일 일, 월
전시장소명 OCI미술관
전시장주소 03144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관련링크 http://ocimuseum.org/portfolio-item/%ea%b2%bd%ec%a0%9c%ec%97%bd-%eb%a8… 3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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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것


 

주변의 비극적 리얼리티: 경제엽의 회화적 리얼리즘에 관하여


 

“‘알다시피, 인민은 행방불명이다’ 인민이 행방불명이란 것은 예술과 부재하는 인민 사이의 근본적인 친화성이란 것은 분명치 않으며 또 미래에도 그렇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인민에게 말 건네지 않는 예술 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1)

 
경제엽 작가의 그림은 비천한 자들의 세계를 꼿꼿이 주시하는 자의 슬픔으로 포화한 이미지이다. 2020년 어느 전시에서 경제엽의 <시체와 갯벌> 회화 작업을 소개하고자 했을 때, 그의 거친 페인팅에서 직면해야 했던 놀라움도 그런 것이었다. 갯벌에 처박힌 사체와 자신의 집단적인 안녕을 위해 사체를 방치했다는 마을 주민들의 공모라는 엽기적인 서사를 그는 그림으로 옮겨놓고 있었다. 우화의 형식을 빈 회화 작업을 한다는 것 자체도 당혹스러웠지만 작가가 제시하는 화면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기울인 관심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지글거리는 심정으로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이의 주관적 정동을 격렬하게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독일 표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일원이었던, 그러나 표현주의가 리얼리즘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 바짝 붙어 리얼함의 또 다른 지경임을 보여주었던 오토 딕스(Otto Dix) 같은 작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
 
경제엽의 회화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원리를 우리는 ‘서발턴(subaltern)’의 슬픔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먹고 사는 것> 연작에 앞선 그의 페인팅 연작들 <사유지>(2022)나 <기괴가옥>(2022-23)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주변의 세계이다. 주변의 세계란 ‘기괴가옥’에 거주하는 사회초년생(빈곤 청년)이거나 한 때 사회학자나 인류학자들이 ‘도시 비공식부문’(임금노동자라는 ‘공식’ 부문에 편입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도시의 빈곤계층을 가리킨다)의 인물들의 세계이다. 혹은 그들은 사유지를 점유하거나 침범하는 노숙자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변의 세계를 노출하고 조준하는 작가의 시선은 지난 시대의 비판적 리얼리즘이 담지하고 있었을 비판과 풍자의 힘이 탑재되어 있지 않다. 이는 더 이상 그러한 것을 이루기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계를 재현하려는 리얼리즘적인 욕망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경제엽의 회화가 시작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부터이다. 사진적 리얼리즘이 이미지를 경험하는 방식을 압도하게 되었을 때, 회화가 어떤 이미지를 생산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갈래로 주어질 수 있다. 회화의 매체-특정성이 더 이상 관심사가 되지 않을 때, 회화는 사진이나 디지털 카메라, 휴대전화의 스크린 같은 매체가 생산하는 시각적 경험을 복제하거나 전유하면서 회화적 평면의 종별성을 탐색할 수도 있다. 혹은 기술적 시각매체가 전면화한 즉물주의적 객관성에 맞서며 주관적 표현으로서의 이미지를 강변하거나 시각적 재현에 저항하는 실재(the Real)의 ‘있음’을 지시하겠다는 의지의 미학적 표현(끈덕지게 되풀이되는 ‘숭고’와 ‘언캐니(uncanny)’ 등의 미학적 개념의 출몰, 그리고 정동(affect)에 쏠린 관심 등은 이에 해당될 것이다)으로서의 회화를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냉소적인 회화적 리얼리즘, 즉 현실을 재현하는 것으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함을 구성하는 시각적 코드와 어법을 그려내며 회화적 시뮬라크르와의 유희를 즐기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현실을 재현하는 미디엄으로서의 회화의 근본적 무력함이란 전제에 기댄다. 그런 회의주의가 ‘회화 이후의 회화’란 이름으로 윤색되고, 또 그런 연유로 회화의 귀환 혹은 재발견이란 상투적인 제명의 전시를 꾸준히 생산하여 왔다.
 
그러나 경제엽은 완강하게 현실의 재현으로서의 회화를 고집한다. 모든 시각적 재현은 현실이라는 환상을 생산하기에 의심을 품어야 한다는 헛똑똑한 주장들이 상식으로 자리잡은 세상에서, 현실을 재현하겠다는 것, 그것도 ‘리얼’하게 재현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할 일일 것이다. 작가 역시 주변으로부터 리얼한 회화를 그리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반복된 물음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음을 가끔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리얼함이란 형식이자 내용 모두를 가리킨다. 모든 이미지는 어떻게든 우리가 처한 세계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방식을 드러내고 더불어 그렇게 접근하는 현실(그것은 사실적 데이터들이 아니다)을 상징화한다. 리얼리즘이 내 뜻대로 선택하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도 그 탓이다. 리얼리즘에 관한 강력한 거부는 역설적으로 리얼리즘을 쇄신하려는 요구에 불과하다. 현실은 역사적인 변화 속에 놓여있고 당연히 리얼하게 재현한다고 간주된 형식 역시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경제엽의 회화는 점점 더 재현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붙잡고자 한다. 개인의 경험적 지각으로는 더 이상 포착할 수 없는 광막한 현실의 네트워크를 고려한다면, 그리고 지각적 경험이 압도적으로 기술적 매체를 통해 매개되는 상황을 짐작한다면, 현실이라는 것의 가까이에 다가서겠다는 의지는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외면한 문제에 여전히 헌신하겠다는 집요한 고집이다. 경제엽의 신작 연작 <먹고사는 것>은 그러한 현실을 도려낸다. 그것은 요리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숱한 이미지들과 먹기의 쾌락에 도착적으로 집착하는 영상들이 압도하는 세계를 떠올리자면, 이례적이고 또 급진적인 부정이라 할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직면해야 했던 그런 허위적 이미지들에 대하여 응수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의 회화적 이미지들을 먹고 ‘사는’ 것이라 명명한다. 즉 그는 먹는 곳에서, 먹는 자들의 모습에서, ‘사는 것’을 찾아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거기에서 사는 것이 드러나는 ‘현실’을 포착한다. 사는 것이 전개되는 세계, 현실이 알레고리적으로 상징화될 수 있는 장소로서, 작가는 ‘식당’으로 침투한다. 작가에게 식당은 현실을 상징화할 수 있는 잠재성이 집적된, 그리고 리얼리티(이미지이자 외적 현실 모두로서의 리얼리티)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작가가 늘 배회했던 ‘주변’의 정수일지 모른다.
 
<먹고사는 것>을 주도하는 작업은 “늦은 점심”, “아무데나”, “회식”, “마감 시간”, “이른 아침” 같은 대형 사이즈의 페인팅일 것이다. 이전의 작업에서도 작가가 애용하던 기이하게 왜곡된 원근법이 여기에서는 더욱 극적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 안에서 우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점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어떤 비인격적 사물이 바라보는 듯한, 혹은 종잡을 수 없는 어떤 으스스한 응시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뿜는다. 작가는 전작들에서 이미 그런 화면의 구성을 채택하여 왔다. 그것은 CCTV 같은 기계적 시선이 생산한 이미지들, 하룬 파로키가 더 이상 인간이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계-눈이 보도록 생산된 이미지를 가리키고자 그런 이미지들에 붙여준 이름을 따르자면 가동적 이미지(operative image)란 것들을 상기시킨다. 그런 이미지들은 더 이상 인격적 주체들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더라도 죽은 객체와 같이 취급되는 세계의 풍경을 상징화한다. 또는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이 더 이상 살 만한 곳이지 않은 세계를 환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다른 회화들을 구성하는 방식과도 연계된다.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다른 회화 작업들, 아니면 “불맛”, “가든”, “손질”, “짬”, “열기”등에서처럼 인물이 등장하지만, ‘인물과 배경’이라는 시각적 어법을 위반하며 배경과 분간되지 않은 죽은 색채 더미로 출현하는 인물들은, 현실을 죽은 사물들로 가득한 세계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세계 속의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재현할, 즉 자신의 삶을 의미있는 서사 속에 통합할 수 있는 시각적 서사를 획득해야 할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난관을 증언한다. 그렇기에 민중미술에서의 비판적 리얼리즘이 ‘민중’을 화면 속에 도입했던 것처럼 오늘날 인물들은 민중과 같은 이름의 상징적 주체로 화면 속에 등장할 수 없을 것이다. “트리오”라는 작업은 그렇기에 더욱 통렬하다. 플랫폼 노동의 첨병인 배달노동자, ‘라이더’ 트리오를 그린 이 회화는, ‘민중’과 같은 사회역사적 주체로서의 인물이 부재하는 세계, 앞서 인용한 화가 파울 클레의 말을 인용한 들뢰즈의 단언, 즉 ‘실종된 인민’의 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경제엽의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에 육박하기 어려운, 즉 현실의 리얼리즘적 재현의 난관을 성실하게 또 또렷이 기록하는 역설적인 리얼리즘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는 리얼리즘이 부재하는 곳에서 리얼리즘이 자리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서동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 문화평론가)

 
1) G. Deleuze, What is creative act?, Two regimes of madness: texts and interviews 1975-1995, ed. by D. Lapoujade, trans. by A. Hodges & M. Taormina, Los Angeles, CA: Semiotext(e), 2006, p. 324.
 




 

작가 약력


 
학력
2023 서울과학기술대 대학원 조형예술전공 석사과정
2022 계원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 학사
 
주요 개인전
2025 먹고사는 것, OCI미술관, 서울
 
주요 단체전
2025 Rood, 케이스 서울, 서울
2023 도약의 단초9, 탑골미술관, 서울
2022 렌트, 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21 안전가옥에서의 밤, 빌라해밀톤, 서울
2021 오렌지병, 인디아트홀 공, 서울
 
수상 / 선정
2024 2025 OCI YOUNG CREATIVES 선정, OCI미술관, 서울
 
레지던시
2023 의정부미술도서관 7기, 의정부
 

연락
jeyeobg@gmail.com | @jaeyeopk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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